Review




최원호가 읽은 『노탄 NŌTAN』


필립 퍼키스의 마지막 사진과 이야기, 그리고 ‘보는 것’에 대하여

노탄NŌTAN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 따르면 노탄은 일본의 오래된 디자인 개념으로, 음양의 원리처럼 주제와 배경 중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게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어느 정원에 속한 무언가가 정원 안의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면 그 정원은 실패한 것이다... 책 앞에 실린 이 이야기를 읽자 내가 사랑하는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만든 <북쪽의 생각The Idea of North>이다.

 

<북쪽의 생각>은 아주 추운 캐나다 북부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인터뷰한 음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굴드 자신이 ‘대위법적 라디오’라고 부른 연출이다. 조근조근 이어지는 기차 소리 위로 인터뷰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겹치고 섞이는데, 이때 각각의 목소리는 고유한 주제이자 악기가 된다. 두 개 이상의 주제가 합쳐져 구축하는 새로운 구조,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푸가다. 그리고 각 음성은 이렇게 푸가의 일부가 되는 순간 의미로부터 벗어난다. 


예를 들어 북극의 자연을 찬미하는 목소리와 긴 겨울의 고독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질 때, 두 개의 증언‘이었던’ 것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게 변함으로써 순수한 소리-이미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청취자는 그 목소리들의 과거를, 다시 말해 각 목소리에 회상과 주장이 담겨 있던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푸가의 일부로 변모한 음성들은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혹은 할 수 없다). 그때부터 그 목소리는 하나의 제스처이자 콘트라스트로 받아들여진다. 높낮이, 간격, 길이, 강약. 즉 오직 리듬인 것.

 

이런 식으로 굴드는 메시지를 담은 목소리들을 가져온 뒤 그 의미를 지움으로써 투명한 이미지로 탈바꿈시킨다. 달리 말하면 이 사운드 다큐멘터리는 점점 겹쳐지고 두터워질수록 오히려 더 투명해진다. 굴드가 종종 자기 예술 세계를 비유하고자 언급했던 ‘북극’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구상이었더라도 이내 자기 몸을 뒤덮고 있던 의미를 털어 내고 추상이 되어 가는 것들. 아주 먼 북극으로 향하면서 점점 줄어드는 인간들. 아무런 표제도 목적도 없는 청정한 표면을 점점 더 드러내는 이미지들. 더욱 완벽한 흰색을 향해 다가가는 풍경. 


이 여정의 종착지(굴드에게 있어 이곳은 바흐와 쇤베르크의 음악이 다다르는 곳과 일치한다)에는 의미의 불모지에서 자라나 오로지 감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렇게 구상이 사라져 버린 광막한 풍경 속에 머물다 보면 거기서 새로운 상념이 피어나고, 그 상념으로부터 의미가 태어나고, 그때 구상은 다시 시작된다. 


추상과 구상이 계속 서로를 낳고, 상대를 지우거나 스스로 사라지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시간의 흐름에 올라탄 청각 예술 속에서, 구상과 추상은 음양의 흐름처럼 서로에게 옳은 때를 주고받으며 오고 가는 것이다.

 

필립 퍼키스와 박태희의 대화가 담긴 <노탄>의 본문 역시 이런 흐름 속에 담겨 있다. 퍼키스는 매번 한 시간이 넘는 통화 내용을 복기하면서 수 페이지, 때로는 한 페이지 안에 담길 만한 문장들만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이 문장들은 때로 한 페이지가 넘기도 하고 때로는 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단락들로 엮여 있다. 


퍼키스가 대화에서 모든 맥락을 편집해 냈기 때문에 녹음 순서대로 늘어놓아진 이 단락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는 알 방도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의 문장들은 내러티브를 형성하지 않는다(혹은 할 수 없다). 


<노탄>에 담긴 모든 서술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고, 독자는 이 책에 담긴 대화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비처럼 한 방울씩 맞게 된다. 독자들은 하나하나의 빗방울 즉 각 단락이 각자 빚어 낸 이미지는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저 모든 선명한 빗방울 가운데 이름이나 목적을 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탄>은 구상을,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 책이다. 무심하게 빛나는 순간들만이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

 

독자는 이 뜻 없이 아름다운 에피소드와 잠언들 사이에서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마치 중심 선율이 없이 모든 음이 서로의 배경이 되며 중심이 음푹 팬 공간을 형성하는 존 케이지의 실내악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다(그러고 보니 이 책의 서문은 존 케이지를 인용하며 끝난다). 


청취자의 의식을 서둘러 붙잡으려는 주 선율이 없으므로 존 케이지를 듣는 이의 의식은 편안히 소리-공간 속을 거닐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탄>의 독자는 세심하게 선별된 뒤 의미의 높낮이 차이가 없이 평등하게 병렬된 퍼키스의 과거와 오늘 속을 거닌다. 부드럽게 굽고 닳은 그의 과거와 조금씩 시력을 잃어 가는 그의 오늘은 모두 거의 고요하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하다. 이런 평정 상태는 퍼키스가 찍은 사진들, 특히 후기의 사진들을 떠올리게 한다. 프레임 속 어느 형태가 다른 형태를 침범하거나 장악하지 않는, 만물이 자기 자리에서 가만히 머무르며 고요한 조화를 이루는 사진을 찍어 왔던 만년의 퍼키스는 글을 쓸 때도 그와 똑같은 움직임과 시선을 선보인다. 자신의 인생을 여러 롤에 담은(녹음한) 다음 천천히 몇 프레임을 골라 내(편집해) 인화한(책에 남긴) 것이다. 그가 거의 평생 수행해 온 행위들, 즉 풍경을 관찰하고 셔터를 누를 때부터 인화지에 떠오르는 잠상을 바라볼 때까지의 움직임과 선택과 기다림이 이 책의 글자들과 문장 부호 속에 묻어 있다. 


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자연스러운 존재의 대척점에 있는 것, 즉 하나의 인공물에 해당한다고 쓴 바 있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는 궁극적으로 피아노가 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퍼키스 역시 하나의 인공물 즉 카메라와(혹은 사진 작업이라는 인공-과정과)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무념의 작업, 반 자동화한 촬영-현상-인화적 행동 속에 담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의미의 종말이 아니다. 거기 담겨 있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퍼키스는 어느 날 암실에서 인화지 위에 떠오르기 시작한 잠상을 보다가 하얀 코끼리가 나오는 시를 떠올린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진을 생각하다가 그냥 그 언어가 나왔고... 네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는 네 자신이 되고 고요해지며 언어가 네게 온다... 아마도 그 언어는 사진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 아마도 사진을 설명하는 건 아니라서 그 사진이 그저 네 마음에 작동한 것일 수도 있어... 분명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그에게 있어 사진을 ‘한다’는 행위는 최종적으로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 이미지 속을 맴도는 코드 가운데 나와 조응하는 것들을 만나 하나의 언어를 떠올리는 일이다. 그 새 언어는 예술 작품의 창작자가 만들어 놓고 전달해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감상자가 자기도 모르게 채워 넣게 되는 공백에서 스스로 태어난다. 


퍼키스가 대화의 내러티브를 삭제한 이유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떠올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이는 그가 평생토록 사진을 통해 추구해 왔던 것과 같다. 이 책을 보는 당신 자신의 마음에서 무언가를 꽃피우는 것. 


예를 들어 <노탄>에 나오는 영원에 관한 두 줄짜리 단락은 그 앞뒤에 몇 분의 대화 혹은 침묵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지 않음으로써 무정형의 공백을 얻게 되는데, 이 측량할 수 없는 침묵은 영원에 관한 언급과 조응하면서 시간에 관한 관념 어딘가를 살짝 무너뜨린다. 나는 그 무너진 틈에서 싹튼 나 자신의 상념들을 관찰하며 오래도록 그 두 줄 안에 머물렀다.

 

필립: 토요일에 얘길 더 할 수 있지? 그렇지?

태희: 그럼요, 토요일은 영원해요.

 

이렇게 아주 작은 영원들이 빈 행마다 박혀 있는 1부가 지나고 나면 퍼키스가 마지막으로 그의 집 근처에서 찍은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진들에는 의미의 초점이 사라져 있어서 언뜻 보아서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하지만 1부에서 내러티브의 공백 사이를 무념의 이미지처럼 채우고 있는 문장들을 계속 읽어 온 독자들은 사진의 뉘앙스가 1부의 텍스트와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퍼키스는 자신이 포착한 이미지를 의미로부터 떨어뜨리려 하고,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가능한 한 커다란 고독과 침묵을 부과해 왔다. 


“그래서 작업 과정은 주제보다는 톤과 구조에 대한 거야.”


 이 소박한 고백에는 그가 온 생애 동안 쏟아부은 의지와 소망이 담겨 있다. 이러한 영혼이 포착한 사진을, 또 그와 꼭 닮은 텍스트를 담고 있는 <노탄>은 퍼키스의 생애를 회고한다기보다는 그가 어떤 생각과 소망을 품고 사진을 만들어 왔는가를 방법론적으로 재현한 텍스트를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 진실로 담겨 있는 건 지나간 광경들이 아니다. 퍼키스는 자신의 과거라는 새 소재를 받아 지금까지 늘 해 왔던 작업을 반복한다. 땅을 엎은 뒤 저 먼 곳에서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틔우길 소망한다. 


<노탄>은 그가 평생 수행해 왔던 오늘들이다. 


이 마지막 책 속에서 퍼키스는 영원한 오늘 안에 머물러 있다.



최원호 | 『혼자가 되는 책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