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박재현 : 새로운 불행의 경험
9 Mar - 9 Apr, 2023
안목 기획전
New Miserable Experience
"이름 없는 장소의 알 수 없는 존재들은
그 어떤 것도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침묵하지 않으면 저 빛 안에 들 수 없으니
이반, 조용히 지나갑시다
빛들이 마당, 눈밭, 숲길을 스칠 때,
시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흘러가고
비천한 것들이 정갈히 자리 잡은 바닥의 풍경
말없이 바라보는 자가 있고
성긴 가지 사이로 보석처럼 빛나는
저 사라질 것의 황홀함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온 길들
흔적도 없이 소멸할 빛과 그늘의 연주에 귀기울여봐
돌아올 주인, 눈앞의 주인, 꿈 속의 주인
하염없이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차창 너머 굳건한 기다림의 얼굴
트럭이 지나간 길 위에서 개는 걸음을 멈추고
인형이 내버려진 강바닥에서 새는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눈을 쓸던 빗자루는 빗질을 멈추고
적요한 풍경 앞에 사진가는 걸음을 멈춘다
식당 테이블 위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처럼
우린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아름다웠지
볕은 따스했고, 잠시나마 마음을 녹일 수 있어
죽음이 따라오듯 소녀는 뒤를 돌아보고
애비 잃은 슬픔 아래 흰 꽃은 피고 지고
거센 바람 맞아 나무도, 가로등도 기꺼이 쓰러지네
서로가 서로를 기대며 지나온 불행의 경험
함께 바라본다는 것의 부드러운 위안
어둔 맘이 환해지는 비닐 궁전
이반, 조용히 해봐
우리를 감싸는 빛의 소리를 들어봐"
골목 주인 백
사진 속에 위로하는 존재들의 빛, 그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박재현이 20년 넘게 촬영한 사진들을 엮어 <새로운 불행의 경험>이라 이름 지었다. 36장의 흑백사진이며 필름으로 찍고 암실에서 인화한 젤라틴 실버 프린트다. 세월의 격차를 두고 인화된 사진들은 전시회 를 위해 한꺼번에 준비한 것이 아니라서 인화지도 계조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진은 20년 전의 프린트가 있고 가장 최근의 프린트는 일주일 전의 것도 있다. 부드러운 저음의 사진이 있는가 하면 강렬한 명암으 로 고음과 저음이 번갈아 연주되는 협주곡 같은 사진도 있다.
작업이 이루어진 시간의 길이나, 최종 프린 트의 시점을 본다면 이 작업은 어떤 유용한 목적 없이 평생에 걸쳐 진행 중이며 40대 중반에 이른 사진 가의 현재까지 이루어진 작업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들에 담긴 장소나 대상도 개인적인 차원의 경험을 벗어나지 않는다. 보기 좋은 풍경이라 할 것도 없고, 특정할만한 내용도 없다. 오로지 빛과 그림 자만이 주인공인 사진도 있다. 그야말로 무국적의 사진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우릴 파멸 시키듯 또한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변방의 이름 없는 식당에서 텅빈 창문을 배경으로 양념통의 뚜껑을 닫고있는 무표정한 여인의 저 하찮은 동작이 왜 나를 고요히 밝혀주는가? 단 한 번도 기척을 내지 못한 삶의 풍경이 어떻게 숭고한 성화로 변모하는가?
찰나의 순간에 정지된 여인의 정물화가 홀연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삶의 두렵고 아름다운 정체를 초월적인 예감으로 환기하는 경험, 이것이 저 제목 <새로운 불행의 경험>의 속뜻이리라.
박재현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고 낯선 정적이 흐른다. 떠나가고 떠나오는 버스터미널, 해진 바지를 입은 남자의 그림자는, 해가 저물기 전 마지막 빛의 강렬함을 반증하듯 검고 길게 드리운다.
이제 곧 밤이 올 텐데, 우리에게 남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아직 못다 한 일이 무엇인지, 오직 시들기만 기다리 는 사람들을 마치 소리없는 음악처럼 감싸는 빛과 그림자는 사진 속 대상들의 면면을 연결하여 내밀하고도 실존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덩그라니 놓인 비닐 하우스는 환한 빛의 성지가 되고 뒤편에 보이는 관목들은 마치 그 궁전의 거주민들처럼 자부심에 차 있다. 곧 녹아 없어질 눈 뭉치가 성긴 가지 사이로 보석처럼 빛나며 축축하게 젖은 어느 집 안마당 한 켠엔 수도 호스가 하나의 선으로 꽃을 피우고 시골집 담장 소복이 눈으로 덮인 땅바닥엔 겨울잠을 자는 곰의 얼굴마저 보인다.
과대망상일까? 꿈 밖에서 상상 하는 것들이 움직이는 사진 속 현실이다. 시선의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지각하는 능력이며 환상과 환청의 체험마저 불러낸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의 길을 걷고 있고 그가 멈출 때마다 그곳엔 오직 그에게만 비밀스러운 장면들 이 있다.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을 그 장면들은 대상을 스스로 노래하게 하라는 강령을 수훈으로 삼은 듯한 한 사진가의 카메라로 소리 없이 포착된다.
시선을 제압할 의도라곤 전혀 없는 이 사진가는 아무것도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마음으로 스스로 그 낯선 세상과의 장벽을 걷어내게 한다.
모든 것이 덧없이 소멸해버릴 것이기에 투명하게 빛나는 세상, 그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박재현의 사진들은 은밀한 위안의 경험이다.
무엇보다 나는 온갖 고물들이 정갈하게 진열된 가게의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주인을 바라보는 개와 함께 공고히 늙고 싶다. 저 다정한 빛의 세계 속에서
글 박태희